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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때 기억, 당신은 잊었어도 뇌 속에는 남아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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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때 기억, 당신은 잊었어도 뇌 속에는 남아 있다.

민꼬 2019. 5. 5. 00:04



대부분 3살 이전 경험은 잊어버려
왜 아기의 기억은 사라지는 걸까
뇌·기억 연구의 오랜 연구주제
'신생아도 기억한다'는 사실 밝혀져
배 속에서 들은 엄마 목소리 식별

아동기 기억 쉽게 사라지는 건
해마에서 신경세포 생성 늘어나
기억세포 활성화 패턴 바뀌기 때문
기억 회상은 어려워도 기억은 남아
동물실험에서 잊힌 기억 되살려내


어릴 적의 기억은 자라면서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도 자신의 경험을 저장하는 기억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게 여러 연구에서 밝혀져왔다. 최근에는 잊힌 어릴적 기억 또한 회상하지 못할 뿐이고 신경세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첫사랑의 아련함, 첫 등교의 설렘.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특별하다. 여러분에게 최초의 경험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인생의 첫 기억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 집이나 유치원에서 벌어진 일, 동생의 탄생 등 일상적인 경험들이다. 사람들이 답한 가장 이른 기억은 대략 세살 언저리의 일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실제로 대부분 사람들은 세살 이전의 경험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를 ‘영아기 기억상실’이라고 한다. 우리는 왜 첫사랑은 기억하지만 첫걸음마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가수 보아가 ‘아틀란티스 소녀’의 후렴구에서 “왜 이래 나 이제 커버린 걸까, 뭔가 잃어버린 기억”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어릴 적 기억은 왜 시간이 지나면서 미지의 섬처럼 가라앉는 걸까?

신생아는 무엇을 기억할까

아직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아기도 기억을 지니고 있다. 아기도 기억한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기들에게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볼 수는 없지만, 기억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에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아기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기억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처음 자전거를 탄 일이나 처음 유치원에 가던 날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일화기억’이라 부른다.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보조바퀴 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는지는 기억하더라도, 자전거가 무엇인지를 언제, 어디서 처음 배웠는지 기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전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기억이며, 이러한 기억을 ‘의미기억’이라 부른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억이다. 어떻게 해야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절차기억’이며, 의식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처리되는 암묵기억의 일종이다. 형태가 다르더라도 정보를 저장하고 나중에 다시 꺼내서 사용할 수 있다면 기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기가 잘할 수 있는 ‘행동’을 측정하고 관찰하면, 아기의 뇌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저장(기억)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일찍이 1980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심리학 연구팀이 신생아의 행동 반응을 살펴 아기의 기억을 이해하려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아기는 신생아 때부터 젖꼭지를 빠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연구진은 아기가 젖꼭지를 빠르게 빨 때는 엄마의 목소리를, 느리게 빨 때는 다른 낯선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그랬더니 생후 3일 이내의 신생아도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젖꼭지를 빠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게 관찰됐다. 신생아도 엄마의 목소리와 낯선 목소리를 구분한다는 이 연구 결과는 아기가 배 속에서 듣던 익숙한 소리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른 유명한 실험도 있었다. 아기의 발과 모빌을 끈으로 연결하면, 아기는 곧 자신이 모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다리를 움직인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럴린 로비콜리어 교수는 생후 2개월의 아기도 자신이 움직였던 모빌을 다시 봤을 때 더 열심히 발차기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아기는 발과 모빌이 연결되지 않아 모빌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발차기를 했다. ‘내가 저 모빌을 움직였다’는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기들도 경험을 저장할 수 있지만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다. 생후 3개월 아기는 1주일 정도밖에 모빌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지 못했다. 돌이 지난 아기는 두달 이상 기억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수록 점차 기억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아기 때에도 경험을 저장할 수 있는데도 우리가 세살 이전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Hippocampus)와 관련이 있다. 해마는 특히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억, 즉 일화기억을 저장하는 데 중요하다.

어린 아기의 뇌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경세포가 새로 만들어지는데, 성장하면서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속도는 줄어든다. 해마의 신경세포가 많아지고 연결이 복잡해지면 기억을 더 잘할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시나 조슬린과 폴 프랭클랜드 교수는 해마에서 신경세포 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기억을 잊게 되는 뜻밖의 현상을 발견했다. 이들이 2014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아기 쥐한테 해마 신경세포의 생성을 억제했더니 오히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 잘 유지됐다. 반대로 어른 쥐한테 해마 신경세포의 생성을 늘리자 기억을 쉽게 잃었다.

뇌에 숨어 있는 기억을 깨우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기억은 신경세포에 일대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뇌 영역에 걸친 신경세포들의 활성화 패턴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지난주에 놀이터에서 그네를 탄 경험이 신경세포 ㄱ, ㄴ, ㄷ이 활성화되는 패턴으로 저장되었다면, 어제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논 기억은 신경세포 ㄴ, ㄷ, ㄹ의 활성화 패턴으로 저장되는 식이다. ‘놀이터에서 놀았다는 것’은 지난주나 어제나 비슷하기 때문에 겹치는 신경세포 ㄴ, ㄷ의 패턴으로 저장되고 ‘지난주에만 탔던 그네’는 신경세포 ㄱ의 연결로, ‘어제만 탔던 미끄럼틀’은 신경세포 ㄹ의 연결로 나타낼 수 있다. 기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이렇게 저장했던 패턴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신경과학에서 기억은 결국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패턴으로 이해되는데, 여기에 새로운 신경세포가 계속 만들어지고 연결된다고 생각해보자. ㄱ, ㄴ, ㄷ 사이에 새로운 신경세포 ㅂ이 엉뚱하게 이어지기도 하고, 새로 연결된 ㅂ 때문에 ㄱ과 ㄴ의 연결이 약해질 수도 있다. 결국 신경세포가 늘어나면서 원래의 연결 기억 패턴을 그대로 활성화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해마 신경세포의 증가는 대신 새로운 기억의 저장을 더 쉽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기존의 경험과 상충되는 새로운 기억의 저장이 더 쉬워진다. 즉, 어제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탄 기억을 저장할 때, 지난주에 그네를 탄 비슷한 기억은 방해가 되지만 해마의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시기에는 ‘놀이터-그네’의 기억을 지우고 ‘놀이터-미끄럼틀’이라는 새로운 기억을 잘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늘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아기 때에는 기억을 유지하는 것보다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학습하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신경세포 연결 패턴이 변했더라도 모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떠올리지 못할 뿐 뇌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미국 템플대의 심리학자 노라 뉴컴 교수는 색다른 실험을 통해서 아이들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해도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7살 언저리의 아이들에게 온전한 얼굴 사진과 눈, 코, 입 등 일부만 나온 사진을 보여주고 두 사진이 같은 사람의 얼굴인지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사진의 일부는 4년 전 찍은 어린이집 친구들이었고 일부는 낯선 사람이었다.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4년 전 친구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보다는 기억하지 못하는 4년 전 친구들의 얼굴을 더 정확하게 비교했다. 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기억의 흔적이 뇌에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숨은 기억을 다시 되살릴 수는 없을까? 앞서 말한 조슬린과 프랭클랜드 교수팀은 2018년 발표한 동물실험 연구에서 인위적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시도를 했다. 우선 아기 쥐들에게 약한 전기충격을 줘서 공포기억을 만들고 이때 활성화된 신경세포들을 식별해두었다. 아기 쥐들이 자라면서 기억을 잃더라도 어릴 적에 식별된 그 신경세포들을 인위적으로 활성화하면 쥐들은 다시 공포반응을 보였다. 다시 말하면, 아기 때의 기억은 다시 떠올릴 수 없었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생아는 태아 시절에 경험한 언어 자극을 기억해 낱말들을 식별해 다르게 반응하는 뇌파 신호를 보여주었다고 2013년 핀란드 헬싱키대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보고했다. 뇌파검사(EEG)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은 아기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장비다. 헬싱키대 제공

어린 시절 기억 오래 유지하는 방법

기억을 도울 수 있는 다른 인지기능의 발달도 영아기 기억상실에 영향을 끼친다. 동물원에 다녀온 성인은 “동물원에서 사자도 보고 기린도 봤다”라고 중요한 정보 중심으로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지하철을 탔고요, 기린을 봤고, 점심을 먹었어요. 저녁도 먹었고요, 지하철을 탔어요”라고 중요하지 않은 일상적인 일까지 자세히 얘기하곤 한다. 어릴 때는 많은 일이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쌓이고 사전지식이 많이 생기면 이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일은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언어 능력 또한 기억의 형성과 유지에 도움을 준다. “동물원에 다녀왔어요”라는 아이에게 “동물원에서 기린도 보고 사자도 봤지?”라고 직접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것보다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아이에게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면 아이는 더 오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 언어를 사용해 기억을 더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기억을 회상하고 무엇이 중요한 내용인지 학습하여 기억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기억에 대한 연구는 뇌파검사(EEG)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등 다양한 신경영상 기법을 사용해 아기 뇌의 활동을 직접 측정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뇌파검사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은 아기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안전한 장비다. 그러나 실험 중 길게는 1시간 이상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아기의 뇌를 직접 촬영한 연구는 아직 적은 편이다. 아기의 머리 움직임을 보정하는 기술이 개선되고 아기들도 집중할 수 있는 짧고 흥미로운 실험 방법이 다양하게 개발되면서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진이 아기의 뇌를 직접 촬영하는 연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아기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지기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기의 뇌를 직접 촬영하는 연구는 기억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지기능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다섯가지 감정 캐릭터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에서, 라일리의 기억은 구슬 안에 담긴 영상으로 그의 머릿속에 보관된다. 태어나서 처음 본 엄마 아빠의 얼굴 또한 구슬 안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머릿속의 기억처리반은 라일리가 신경을 쓰지 않아 색이 바랜 오래된 기억 구슬을 치워버리는 일을 한다. 처음 부모님의 얼굴을 본 순간, 따뜻했던 아기 침대의 느낌을 직접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망각은 기억에서 꼭 필요한 기능이다.(망각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또한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뇌는 첫 기억의 흔적을 라일리의 오래된 기억 구슬처럼 아직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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